내 마음에 수다쟁이가 산다, 스토리 없는 예수

내 마음에 수다쟁이가 산다

최대의 적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필요한 건 큰 지성이나 용기나 재주가 아니다. 그저 조금만 더 인내심을 발취했더라면 끝날 일이었다. 새로운 정보를 수집하고 화력을 증강하고 전략을 다듬을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저 땅을 몇 번만 더 두드리면 승리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었다. 끈기의 문제였다. (p. 292)

이렇게 우리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저자는 성도의 삶에 ‘전투 피로’가 바로 우리의 영적인 삶에서 승리는 또 다른 전투의 시작을 알려주는 것을 잊게 만든다는 것을 언급한다. 이 책은 우리 마음속에 끊임없이 찾아오는(멈추지 않는 영적 공격) 수다쟁이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는 책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마음을 지키지 못할 때가 많이 있다. 이 책은 우리의 영적인 마음을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지킬 수 있는지 총 4개의 파트를 통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첫 번째는 바로 ‘불안을 심는 거짓말’, 둘째는 ‘두려움을 심는 거짓말’, 셋째는 ‘죄책감을 심는 거짓말’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낙심을 심는 거짓말’이라는 수다쟁이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과 그에 대한 성도의 영적인 믿음의 반응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는 먼저 이 책을 통해서 성경의 사람들이 우리와 똑같이 신앙의 시험들과 사탄의 거짓 공격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어려움에 있을 때 ‘나만 홀로 남았다’는 엘리야의 심정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주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지금도 여전히 주님을 위해서 치열하게 영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는 주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렇기에 나만 홀로 어두운 영적인 터널을 지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에 위로가 되고 다시금 주님과 함께 새롭게 시작해보려는 새 힘을 얻게 된다.

또한 이 책은 사탄의 정체와 사탄이 성도들을 쓰러뜨리고 넘어뜨리려 하는 다양한 공격방식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 백승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사탄에 대해서 ‘거짓말쟁이(요 8:44) 이며 저자 식대로는 수다쟁이(Chatterbox) – p. 23’라고 설명해주고 있다. 그래서 이 거짓말쟁이 사탄 즉 수다쟁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우리를 방해한다고 설명해주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는가? 그것은 첫째, 틈만 나면 떠들고, 둘째, 멈추지 않고 떠든다는 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 삶을 점검하게 만들어준다. 이 수다쟁이의 공격에서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를 격리의 장소로 가야한다는 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바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장소로의 떠남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주님을 찾고 주님을 구하는 삶을 통해서 수다쟁이의 멈추지 않고 떠드는 소음에서 영적인 공격에서 우리는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주님을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끈기를 가지고 붙잡기를 기도해본다.

스토리 없는 예수

먼저 이 책은 천주교 선교사 자격을 받았지만 20여년동안 한 사람에게도 예수를 전하지 않았다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저자 우덕현이 바라보는 성경에 대한 이해를 적어논 글이다. 먼저 이 책은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큰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평이다. 왜냐하면 저자는 이 책의 전반부에서 ‘성경형성의 역사’에 대해서 소개해주며 이 성경형성의 역사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져온 역사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각은 성경에 등장하는 노아의 나이 또는 노아의 방주 사건 나아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과 아브라함의 아내를 누이로 속이는 일등의 성경의 사건을 개인의 생각과 판단을 통해서 은유와 상징으로 치부해버리고 그 안에 있는 정신 또는 의미에 집중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 글을 읽다보면 저자의 논리나 주장에 혹하여 ‘정말 그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의 주장을 글을 통해 잘 펼치고 있다. 그러나 저자도 주장하는 것처럼 아무리 논리가 훌륭하다고 해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많은 부분 저자의 생각 또는 저자가 추측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것을 읽어보면서 이것은 단순히 저자의 바람일 수 있는 요소가 다분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성경 형성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전반부도 그렇다. 성경의 형성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개입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성경은 한낱 인문학 서적 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개입과 도우심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들을 통해서 성경이 형성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외경과 위경 속에서도 예수의 정신과 예수의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들을 열어놓고서 성경 형성의 과정에 일어날 수 있는 오류의 가능성들을 언급한다. 물론 충분이 그런 가능성들을 열어놓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21세기 성도의 눈으로 성경을 이해해서는 결코 안 된다. 물론 이 표현도 저자가 언급했다. 믿음의 선진들을 통해서 지금의 자신의 책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표현을 사용하는 저자는 기존에 예수님을 이해한 대부분의 내용들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면서 그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제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교회사 속에 주님이 사용하신 사람을 능가할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저자에게 말씀해주셨다고 고백하고 있는 “내가 못다 한 말을 채워 세상에 전해다오!”란 문장을 읽는 순간 이 책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성경의 충족성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하나님께서 성경의 예수님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세상에 온전한 나를 전해달라”는 것을 주장할 수 있지만 그러한 마음도 교만이고, 하나님께서 못다 한 말이라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책은 매우 위험한 책이라고 평하고 싶다.

청소년들이 읽어도 괜찮을까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에 “기대가 크다”는 답변은 평자 개인에게는 실망이 컸다. 그만큼 이 책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는 것 같지만 이 책은 예수님을 바로 이해하고 바로 믿으려는 사람들에게 실망이 클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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